1. 삶의 의미에 대해


고백하건대 나는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계속 곱씹어왔다. 사는 게 힘든지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삶이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인 것이다.

대부분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지만 가끔씩 소소한 즐거움도 있으니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다른 많은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왜 사냐?”라고 묻는다면 나도 다른 이들처럼 “사는 게 이유가 있어서 사냐?”라고 되물었을테니까.

하지만 사변(思辨)적인 성격 탓인지 삶의 즐거움이 부족한 탓인지 계속해서 그 물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왜 사나? 사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해야 하겠지만 너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바로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다.

우선 의미(意味)는 ‘뜻’이거나 ‘가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는 ‘말이나 글의 뜻(meaning, sense)’이라는 개념 말고 ‘사물이나 현상, 행동의 가치(value, worth)’ 또는 ‘중요성’, ‘유용성’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사람들이 삶의 가치로 짚는 것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우선 “태어난 대로 산다.”, “신이 창조한 대로 살아야 한다.” 등의 논리다. 나는 이것을 인과론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원인이 결과를 일으키므로 결과에 귀속되는 자는 원인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얘기를 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본분에 맞게,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얘기하고 그것이 가치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원인에 충실한 삶’이라는 것이 삶의 가치라면, 세상에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그 원인(민족, 부모, 환경, 신)에 의해 규정되고 거기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가치롭다면 어떨까. 나라는 개체는 나의 주인이 아니고 주어진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성공에 대한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면 설사 주어진 것에 복종하며 산다 한들 보람이 있을까. 그래서 항상 우리는 나를 찾아 나선다.

두번째로 목적론적 삶이 있겠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세운 목적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있을까. 게다가 부나 사랑, 명예, 여러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부를 추구하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사랑과 명예를 얻으려면 열정적인 구애와 헌신을 해야 한다. 쾌락은 스스로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후회가 찾아온다. 개인으로 수립한 ‘목표’는 있을 수 있고 보람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목적’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懷疑)’는 정말 나쁜 것일까? 회의론자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이 “회의론에 빠지다보면 삶의 활력을 잃어버려 도움이 되는 게 없다”일 것이다. 이런 비판이야말로 회의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유용하지 않으니 해롭다라는 인식일 뿐이다. 불가지론이나 회의론, 비관주의가 정신을 건강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으로만 비판받아야 한다면 먼저 건강한 정신으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밝힌 다음에 주장해야만 할 것이다.


***


처음으로 돌아가서 뻔하지만 부끄러운 나의 결론은 대체 ‘삶의 의미’란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누군가 가르쳐준다 한들 나는 수긍하기 힘들 것만 같다.

나는 사변(思辨)을 통해 삶에 의미가 있을까를 곱씹어봤다. 결론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하나의 생각이 남았다. 그 모든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고민하는 나는 존재한다. 또 모든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고민하는 나’라는 ‘현상’, ‘실존’은 존재한다.

인과론으로 돌아가면, 나의 본질에 대해서는 절대 알 수 없지만, 나는 절대 그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친다. 새는 껍데기를 깨고 나온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 아직 알 속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인과론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태어나게 한 본질에서 벗어나 성공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결코 우리는 우리의 본질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목적론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본질에 묶어두기를 거부하고 개체로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반드시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니체는 힘의 의지를 발현하여 초인이 되어서 삶과 세계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했던 기존 도덕을 초월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성공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실존 또는 현상은 알 수 없는 본질이라는 것에 두 발목이 묶인 채로 세상에 나타난다.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은 들판에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울지는 모르지만 진짜 탈출한 것인지 아직 본질의 그늘 아래에서 발버둥만 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때 최종적이며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외엔 근거가 없을까. 안타깝게도 남는 것은 “태어나게 해준 본질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나로 재탄생하려는 의지가 아름답지 않느냐”라는 위로일 뿐일까. 폐허 위에 핀 한 줄기 꽃은 아름답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면 괴로울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절망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체념이란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절망의 도시에서 빠져나와 절망의 숲으로 가서 덫에 걸린 족제비나 사향쥐가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는 용기를 보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우리가 게임이나 유흥이라고 부르는 것들 밑에는 이런 무의식적인 절망이 깔려 있다. 그들에게 진정한 유흥이란 없다. 진정한 유흥이란 수고로운 노동 후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행위들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의 [윌든] 중에서


***


- 2018. 4. 5. 옥탑방책방의 글쓰담 모임에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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