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을 때 죽음을 끌어안아야 할 이유 -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

여기 힌두교도, 불교도, 중국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히브리인, 기독교도, 무슬림, 미국 인디언들의 죽음관이 있다.  이처럼 많은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죽음관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관통하는 무언가를 찾는 책이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 - 세계 종교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은 일단 각 종교별로 또는 문화별로 죽음이 무엇인가, 장례의식, 죽음 이후의 세계, 구원 등에 대해 가진 관점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는 죽음을 논하고자 한다면 각 종교의 창조 신화를 참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죽음은 창조와 구분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종교, 문화에 나타난 고유한 창조 신화의 특별함은 그 자체로 죽음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뒤 이어지는 서술에서 그러한 세계 종교, 문화의 죽음관이 서로 차이보다 공통점이 있으며, 그것은 죽음을 단지 끝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마치 하나의 연극이 시작되었다가 막을 내린 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지에 대해 검토한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현재 살아있는 내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살아서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 죽음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설득력있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은 게 약 7일가량 지나서 세부 내용은 가물거리지만, 종교들은 하나 같이 육체적인 죽음이 다가오기 이전에 정신적인 죽음을 겪기를 권유하고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처럼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육체적인 죽음 이전에 반드시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자기만의 세계관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드시 다가올 육체적인 죽음이 과연 끝일까 아닐까라는 무의미한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에서 항상 나의 죽음이 어떠한 모습일까를 상상하고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사색해야 할 것이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
#지식의나무 : 나는 선악의 지식의 나무가 실제로 선과 악뿐만 아니라 빛과 어둠, 위와 아래, 밖과 안 그리고 모든 양극화된 것을 아는 지식의 나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분명히 인류는 자각하여 생각하고 구분할 수 있는 존재, 현재 우리와 같이 되기 위해서 이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만 했다. 이브는 인류의 어머니, 인간다운 특성의 전달자로서 그 과일을 먹었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징벌 :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훔쳐 먹은 것 때문에 똑같이 영원한 징벌을 받는다. 이브는 출산이라는 창조적 과정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받았고, 아담은 노동이라는 창조적 과정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받았다.
고통과 괴로움이 인간에게 있는 창조적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탐구가 필요한 몇 가지 흥미로운 영역들을 만들어 낸다. 붓다가 삶은 괴로움이라고 말한 것은 생명이 창조이고 창조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을 때 그는 창조의 과정, 출산의 과정에 있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의 노동으로 태어난 것은 무엇인가?

- 캄라피티 K. 칼사 /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 380쪽, 부록-정선된 일지 중

그래서 말룽키야풋타는 늘 마음 속으로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구나. 말룽키야풋타여,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말룽키야풋타여, 세상이 영원하다는 것을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영혼과 육체는 일치한다는 것을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는 것을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한다고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룽키야풋타여, 내가 왜 이것을 설명하지 않았을까? 말룽키야풋타여, 왜냐하면 이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종교의 핵심과도 연관되지 않으며, 염리, 욕망의 결여, 중지, 정지, 신통력, 무상지,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 붓다 /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 94쪽, 3장 불교의 죽음관 중

시간은 현상세계에서 일방적으로 흐른다. 미래를 향한 걸음은 한 걸음씩 내딛는 미지의 길 위에 있지만 뒤를 돌아봤을 때 자신의 발걸음은 연이어진 하나의 선으로 남아있다. 죽음의 의미를 회복한다는 것은 생명의 또 한 면인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다. 과거를 돌아볼 때, 그 길의 방향성이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죽음의 위치에서 삶의 방향성을 재확인하려는 것이 바로 죽음의 의미를 검토하는 이유이다. 죽음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을 때, 현재의 위치에서 내 삶의 방향을 확신하고 그 발걸음을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는 것이다.

- 양정연 / [죽음의 성스러운 기술] 393쪽, 옮긴이 후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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