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죽음의 의미에 대해
눈을 뜬다. 순간 동공 안으로 빛이 들어와서 놀라 질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빛이 구름 속에 가렸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찰나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공기의 흐름이 거세지 않다고 느낀다. 공기의 입자가 콧속부터 눈구멍까지 몸의 모든 구멍을 파고 드는데 부드러운 애무를 받는 기분이 든다.
언뜻 푸른 수목이 빼곡한 주위 산의 능선이 보이더니 곧바로 사방이 빌딩의 유리 벽면으로 가득차 빛의 반사가 쏟아져 혼란스럽다. “다음에는 도심에서 하지 말아야겠군.”이라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추락하는 중이다. 아니 사실은 내가 아니라 내가 연결한 피실험자의 몸이 추락하는 중이다. 갑자기 사방이 어둠에 휩싸인다. 삽시간에 온 몸과 정신에 공포가 밀려온다. 그것이 어두움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곧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의문이 들었다.
곧 몸이 움직일 수 없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직 죽지 않았다고 의식했다. 사지의 뼈가 다 부서지고 뇌수가 두개골 밖으로 튀어나오고 피가 사방으로 터진 상태였다. 죽은 상태를 느끼는 감각과 죽은 상태를 바라보는 생각이 중첩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계측 화면이 멈췄다. 기계는 정보가 수신되지 않는 시간이 5초 이상 지속되면 연결을 차단하게 설계해 두었다. 그동안의 죽음 연구에서 몇 가지 사실을 밝혀내기는 했으나 최근에는 진척이 없다.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무의미한 단서만 몇 개 얻었을 뿐 정작 죽음 자체의 의미나 그 이후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그의 얼굴, 정확하게는 그 소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표정이 없다. 공포스러운 표정은 없고 기쁨도 슬픔도 전혀 없는 얼굴이다. 체념한 것인가? 처음 잡아올 때 보였던 두려움은 없어지고 평화를 찾은 얼굴이다. 소년의 얼굴은 어딘가 낯설지 않다. “저 소년은 내가 가르치는 학급의 어느 학생 같군.”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저 얼굴이 내 얼굴인가?”라고 순간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진다.
머리에 연결된 시냅스 가닥들을 하나씩 떼어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컴퓨터의 분석 결과는 보고 싶지 않아. 이 곳이 꼭 그가 죽은 장소처럼 느껴진다. 순간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급히 방을 나온다.
지나치는 아이들이 내게 목례를 한다. 그래 나는 선생이었던 것이다. 매번 그랬듯이 목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괴물 같은 놈.” 늘 나 자신을 스스로 죽이고 싶을만큼 혐오스럽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 감정이 없는 양 행동한다.
그 때서야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삶의 의미를 수년째 고민해오던 나는 더이상 삶에 진정한 의미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엔 죽음의 의미, 그리고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까를 탐구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실험하는 꿈을 몇 번째 꾸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한 예닐곱은 되는 것 같다. 어떤 때는 노인을 대상으로, 어떨 때는 젊은 여성이 대상이 되고, 이번에는 어린 소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매번 나는 죽음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는 낭패감을 갖고 꿈에서 깬다.
그 괴물같은 실험자의 얼굴이 내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남처럼 여겨져 나는 관찰자의 눈으로 모든 과정을 지켜보기도 한다. “그런 방법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어. 이 멍청아.”라고 소리 없이 소리지르면서 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게 꿈일 뿐만인 게 아니라 실제 실험을 하고 있고 있고 그 기억을 꿈에서 되새기는 것이라는 의심이 들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결론은 대충 이렇다. 죽음의 과정은 삶의 과정만큼 중요하다. 삶의 시간에 비해 죽음으로 이르는 시간은 그 길이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지만, 두 시간이 죽는 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거의 동일하다. “정점, 종점 연구”에 따르면 살아가면서 느낀 가장 최악(정점)의 고통의 정도와 죽는 순간(종점)에 느낀 고통의 정도 두 가지를 평균하면 전체 삶의 고통 정도와 일치한다. 즉 죽는 순간에 고통을 최소화하거나 최고의 쾌락을 느끼면 전체 삶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결국 삶의 의미와 똑같이 알 수 없었다.
***
봄 날 한강변에 왔다. 가로길에는 벚꽃이 한창이었다. 대낮이었는데도 하늘이 잿빛이라 벚나무의 화려한 꽃들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 했다. 나는 문득 저 꽃들이 한꺼번에 다 지면 안타깝겠다는 걱정을 했다.
“왜 그렇게 죽음에 대해 고민을 하세요?”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렸는데 순식간에 나는 어두컴컴한 실험실로 와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내가 묶었던 사람들처럼 묶여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정말 죽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또다시 나이어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까 열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서있었다. 얼굴이 흐릿했는데 마치 어릴 때 내 얼굴 같기도 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어서 이거나 빨리 풀지 못해!”라고 소리쳤지만 겁에 질려서인지 실제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살아오면서 소중한 것을 잃어본 적이 없나?”라고 그 소년이 말했는데 이번엔 음색이 달라져 있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의 목소리도 아닌, 노인도 아니고 소년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오빠, 살고 싶어.” 동생이 쓰러지기 전에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수년 전 있었던 그 일. 나는 동생을 보내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어떻게 할 것이 있었다. 동생이 내게 이식 수술을 하면 가망이 있다는 의사의 말을 전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로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내 몸의 일부를 나누겠다고 나서지도 않았다.
동생은 그 말을 한 얼마 후 쓰러졌다.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꿈쩍않고 굳게 다문 입에 끼워진 호흡기가 동생의 이를 모두 부러뜨린 후 죽었다. 염을 하고 동생을 떠나보내던 날, 동생의 온 몸이 죽은 그날 나의 일부도 같이 죽었다. 나는 동생한테 미안했고 죄스러워 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에게 그가 말했다. “소중한 것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하나?” “무심한 벚꽃이 지는 것보다 자신의 죽음이 더 걱정되는 이유가 뭔가?”
동시에 나는 빌딩 숲 꼭대기 가장 높은 건물 옥상 난간에 온 몸이 결박당한 채 매달려 있었고 내 앞에 그 소년이 보였다. 외관상 소년 같아 보였지만 힘이 셌고 마치 거인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젠장 또 빌딩 숲이군.” 나는 속으로 쓴 우스개소리를 내뱉었다.
“자신의 죽음만 걱정하여 편하게 죽으려는 궁리만 하지 마. 벛나무가 벚꽃의 죽음을 겪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봤나?”
“당신이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었나 돌이켜보라구.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봤나?"
"당신은 살아있을 때 진짜 죽어가고 있는거야. 자기 자신의 세포가 죽는 게 아니라 소중한 것을 잃어가면서 말이야.”라고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순간 소년이 내 몸을 밀쳤다. 나는 그 많았던 실험을 하면서도 못느꼈던, 내가 직접 추락하는 것이 얼마나 진짜 공포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휘둥그래져 핏발선 내 눈동자 앞에 소년의 얼굴이 어렸다. 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은 입가가 살짝 올라가 웃는 듯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체념했다. 찰나의 순간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소중한 것을 잃는 사람의 고통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소년의 얼굴은 내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도 같아 보였다. 그건 내 얼굴이기도 했다.
나는 모두에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 정점, 종점 이론 참고 : '쾌락있는 죽음’ 위해 호주 의사가 만든 ‘존엄사 기계’
- 2018. 4. 12. 옥탑방책방의 글쓰담 모임에서 발표.
오타가 두 군데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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