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를 선택하고 사랑에게 선택받다 - [적과 흑]을 읽고
나는 '사랑'을 생각할 때 두 가지 관념이 떠오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과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랑. 나는 강물의 흐름처럼 긴 시간동안 부딪치며 마모되며 이룩되는 사랑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고 있으므로 불꽃처럼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사랑도 일시적인 것으로 큰 가치를 두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여기 [적과 흑]의 격렬한 사랑을 보자. 요즈음의 통속적인 삼각관계로서 바라볼만한 여지가 다분한 쥘리앵과 레날부인, 그리고 마틸드를 다 읽고 난 지금, 내 마음은 혼란스럽다. 그들의 사랑에 통속적인 점 이외에 별다른 점이 있는건가?
원래 쥘리앵은 가난한 계급의 아이로 당시 사회에 대한 불만과 출세에 대한 욕망이 뒤엉킨 복잡한 성정의 소유자이다. 거기에 덧붙여 당시 귀족과 성직자, 평민을 망라하고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인간 군중이 팽배하던 시절에 "능란하고 교활하지도 않고, 경멸받는 것을 몹시도 두려워하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이 실제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둘째치고 왜 그는 그런 선택, 출세가 아닌 사랑을 선택했을까?
내 눈에 그의 선택은 결국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이야기에 19살에 처음 등장해 25살에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남은 생애 몇 달동안 그는 살아오면서 가장 강렬한 열정의 시간을 보낸다. 쥘리앵은 감옥에 있는 시간 동안 "늘 사랑에 빠져 지냈고, 그러는 동안에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레날 부인도 쥘리앵을 따라 "근심을 벗어 버리고 감미롭고 유쾌한 기분에 자신을 내맡기는" 시간을 보냈다. 얼핏 쥘리앵은 자기의 꿈, 출세하고 싶다는 꿈을 애초 생각한 바와는 다른 형태지만 결국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쥘리앵이 바랐던 출세 욕망이 사랑에 대한 욕망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이해될 때 그 사랑은 더이상 순수하지 않게 되는 딜레마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쥘리앵은 애초의 쥘리앵이 아닌 새로운 쥘리앵으로 거듭 나고 구원받은(또는 삶의 목표를 이룬, 또는 행복을 얻은) 것일까?
나는 쥘리앵의 '명예'에 대한 원칙이 남달랐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는 '명예'를 선택함으로써 '사랑'이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는 마틸드도 사랑했다. 마틸드가 가진 귀족 계급의 오만함, 영웅주의 같은 점을 싫어 했지만 마틸드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레날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점을 알게 되는 사건이 있기까지는 말이다.
결국 나는 쥘리앵이 '사랑'을 선택한 게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사랑'이 쥘리앵을 선택했다. 불꽃같은 사랑, 이런 사랑이 영원할 방법은 하나 뿐이다. 쥘리앵이 삶 대신 사랑으로 영원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또 오래 지속되는 삶을 산다 하더라도 레날부인 또는 마틸드와 그 불꽃같은 사랑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쥘리앵은 행운아다. 그리고 '사랑'은 이렇게나 예기치 않게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
이게 요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통속적인 드라마와 다른 점이 아닐까. [적과 흑]에는 치열한 삶과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질문들이 많이 나온다.
그 외 이 작품이 세간에 이른바 '명작'이 될 수 있었다고 평하는 시대상에 대한 치밀한 고찰, 남녀 간 감정 변화에 대한 현란한 기술 같은 부분은 직접 책을 읽거나 다른 평론을 읽으면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책 상, 하권을 읽으면서 밑줄그은 문장들.
[적과 흑 (1830년의 연대기)]
- 스탈당 / 열린책들 / 2009년
[1부]
금전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그들에게 레날 부인은 여전히 적응할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부인은 그들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시골뜨기 쥘리앵이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이 고상하고 자존심 강한 영혼에 공감하면서 부인은 그 메혹적인 새로움에 감미롭고 찬란한 기쁨을 발견했다.
- 57쪽
그가 지금까지 지녀온 정신적 자세는 베리에르 시장 댁에 들어와서도 그대로였다. 그는 이곳에서도 아버지의 제재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위 사람들을 깊히 경멸했고, 그러면서 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 64쪽
"네 성격 깊숙히 어떤 어두운 열정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안좋구나." (..) 선량한 셸랑 신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덧붙였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성직자가 되어서도 네가 구원받을 수 있을지 나는 걱정이다."
쥘리앵은 저신이 감동을 느끼는 게 부끄러웠다.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았다. (..)
사흘 후 신부를 다시 찾아갔을 때 쥘리앵은 자신이 첫날부터 내세웠어야 했을 구실을 찾아낸 상태였다. (..) 셸랑 신부는 이런 구실을 둘러대는 쥘리앵의 태도에서 지극히 세속적인 어떤 열기를 발견했다.
- 68-69쪽
어느 날 저녁, 쥘리앵의 손이 옆으로 크게 움직이다가 레날 부인의 손을 스쳤다. (..)
부인은 재빨리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쥘리앵은 자신이 손을 건드려도 그 손이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신은 웃음거리가 된다는, 혹은 그렇기보다 하찮은 존재가 느끼는 쓰라린 열등감을 맛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 속 모든 즐거움은 즉시 사라져버렸다.
- 76쪽
신분과 재산을 등에 업고 갖은 유세를 부리는 이 작자를 조롱해 줄 방법은 바로 코앞에서 그 아내의 손을 차지하는 게 아니겠어? 그래, 그렇게 하고 말겠어. 이 작자에게 그처럼 멸시당한 내가 말이야.
- 93쪽
부인은 그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열정에 정신없이 내몰린 그녀는 의자 팔걸이에 무심히 놓인 쥘리앵의 손을 다시 찾아 부여잡고 말았다. 부인의 이 행동에 젊은 야심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모든 거만한 귀족 나리들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 이 여자의 애인이 되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의무인 것이다.
- 110쪽
부인의 고통은 쥘리앵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다. (..)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한 벌로 아들이 죽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가엾게도 자신의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죽음과도 같은 회한일거야. 이런 것이 감정이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함이지. 그런데 내가, 가난하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해 무식한데다 때로 행동거지까지 투박한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
- 155쪽
아, 그건 우리가 약한 탓이지 우리 탓이 아니다.
우리가 그런 꼴로 만들어진 이상 그럴 수밖에.
- 십이야(십이야)
- 169쪽, 제21장 서두의 경귀
인간에게 말(言)이 주어진 것은 생각을 숨기라는 뜻이다.
- R. P. 말라그리다
- 187쪽, 제22장 서두의 경귀
그는 오랫동안 말없이 울었다. 부인은 그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부인의 손을 잡았다. 부인은 그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바르르 떠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몇 번이고 손을 뒤로 잡아 빼던 부인은 결국 그에게 손을 내맡기고 말았다. 방 안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두 사람은 레날 부인의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 298쪽
[2부]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다 보니 그처럼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두 눈에서는 차가운 마음이 내비쳤다. 이어서 쥘리앵은 그 눈에서 권태의 표정을 읽어냈다. 모든 걸 분석하고 검토하면서도 매번 강박적으로 위엄을 보여야만 하는 데서 오는 권태였다. 레날 부인의 눈도 정말 아름다웠는데, 하고 쥘리앵은 생각했다.
- 334-335쪽
그는 일분일초도 방심하지 않고 호기를 잡아채는 검사처럼 능란하고 교활한 재능을 갖춘 인간은 못 돼.... 루이 11세 시대식으로 음험하고 술수가 뛰어난 성격은 절대 아니라고. 그런데 한편으론 꽤나 엄격한 행동 원칙들을 정해 놓고 지키는 모습이 보이거든.... 그처럼 갑갑한 신조에 자신을 가두는 이유를 모르겠어.... 자기 속의 열정을 함부로 분출하지 않으려고 미리 '둑'을 쌓으려는 것일까?
게다가 또 하나 확실한 건 그가 경멸받는 걸 몹시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야. 나는 그를 내 손 안에 휘어잡느라 그런 성격을 역이용하곤 했지.
그는 고상한 혈통에 대한 숭배심이 없어. 우리 귀족을 존중하는 본능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그건 잘못이지. 그런데 어쨌거나 한낱 신학생이라면 삶의 쾌락이나 금전의 결핍으로 인해 초조해져 있기 마련인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 경멸을 당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참고 넘어가는 법이 없어.
- 606-607쪽, 라 몰 후작(마틸드의 아버지)의 생각
쥘리앵은 자신이 그처럼 헌신적인 애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영우주의에 지쳐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하며 수줍은 애정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마틸드의 오만한 영혼은 자신을 지켜볼 군중과 자신에게 찬탄해줄 '타인들'을 필요로 했다.
마틸드는 쥘리앵이 죽으면 자신도 살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이 애인이 생명을 잃게 될까봐 그 정도로 괴로워하고 두려워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열렬한 사랑과 숭고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비밀스러운 욕망을 품었다.
- 642쪽
배심원 여러분, 부당한 경멸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계층에 속하는 영예를 얻지 못했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운명에 반항한 일개 농부입니다. (..)
나는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내 죄가 좀 더 가벼운 것이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아직 젊은 나이를 고려하여 동정을 베풀 필요가 있다는 점은 아랑곳없이, 나를 징벌함으로써 나와 같은 계층의 청년들을 징벌하고 그들의 용기를 영원히 꺾어 놓고자 하니까요.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가난에 짓눌리면서도 운 좋게 좋은 교육을 받고,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함이 사교계라고 이름 붙인 사회에 대담하게도 끼어들고자 한 청년들 말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내가 저지른 범죄입니다.
- 658-659쪽, 쥘리앵의 법정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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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쥘리앵이나 레날부인 둘다 첫사랑인 것으로 보인다. |
쥘리앵은 마틸드가 곁에 있어서 빼앗기는 시간만 제외하고는 늘 사랑에 빠져 지냈고, 그러는 동안에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열정이 극에 달해 모든 겉치장이 거추장스러워질 때면 이 열정의 특이한 여파로 인해 레날 부인도 쥘리앵을 따라 근심을 벗어 버리고 감미롭고 유쾌한 기분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었다.
- 6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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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틸드의 사랑도 초인적인 것이었다. |
# 그나저나 이런 사랑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외모가 아름다워야만 가능한 것인가? 1830년이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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