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초_한 남자] 1. 낭만적 사랑
알랭 드 보통이 쓴 [사랑의 기초_한 남자]를 읽고 있습니다. 한 1/3 정도 읽었는데, 사랑의 낭만성이란 게 옛적부터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면에서부터 사악한 면이 있다는 선언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제(우리)가 평상시에 문득문득 느꼈던 점에 대해 정리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불뚝불뚝 솟아나는 감정의 과잉, 사랑으로부터 기인하는 마음의 고통.. 이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바로 해탈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무엇인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줍니다. 물론 합리적인 해결책은 아직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름 괜찮은 타협점은 책을 더 읽으면 나올 것 같아요.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건대, 나의 20대를 지탱한 것은 사랑의 낭만성에 대한 굳건한 희망이었던 것 같고, 그 결과로 지금 나이의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 사랑을 항상 꿈꾸는) 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사랑의 기초_한 남자]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 몇 가지..
"우리는 사랑도 믿고 일도 믿지만
사랑을 위한 일의 가치는 믿지 않는다"
- 맨 앞 부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 - 19쪽.
18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부유한 나라들의 특정 사회계급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하나의 새로운 이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즉, 결혼을 하고 난 다음부터 부부는 자식을 위해서 상대를 참아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깊이 사랑하며 또한 서로를 계속 욕망해야 한다는 놀라운 생각이 등장한 것이다. (...)
부르주아는 낭만적 사랑을 결코 믿지 않을 만큼 먹고사는 문제에 짓눌려 있지도 않았지만, 성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전혀 꺼리낌 없이 복잡하게 얽혀들 만큼 자유롭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정서적 욕구와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야 하는 곤경에 처한 부르주아는 '영원을 서약한 단 한 사람에게 합법적으로 투자하여, 그로부터 최대의 성과를 거두고자 갈망하기'라는 빈약한 해법을 찾아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생계'와 '자유'의 문제를 결부하는 매우 유사한 현상이 '현대인의 행복'을 떠받치고 있는 두번째 기둥인 노동에서도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일 리가 없다. 수세기 동안, 노동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설들력이 없었다. (...)
노동에 대한 부르주아의 이상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처럼 어떤 중간적 태도가 구체화된 것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 (...)
부르주아의 이상이 결코 허황된 꿈은 아니다. 로맨스와 에로스,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 가지 황금요소를 완벽하게 융화시킨 궁극의 결혼도 당연히 있다. (...) 다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할 뿐이다. - 29~33쪽.
단지 결혼하길 원한다는 사실이 결혼상태를 지속하는 법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특별히 신뢰할 만한 기반은 아니다. - 48쪽.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가 자본주의로 알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가 발명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강력한 옹호와 지지 덕분에 발전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도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습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생산하는가를 기준으로 존재를 가차없이 심판하는 시스템 속에서, 더구나 이처럼 종교를 저버린 시대에 우리의 정신이 버텨낼 수 있으려면 비물질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 다른 평가방식이 절실해진다. 그 보루마저 없다면 심판의 위력이 너무나 막강해서 우리의 내면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사랑에 대한 우리의 낭만적 이상주의에는 사악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65~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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