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당신이 나에게 신발을 사주었었다.
당신 혼자 며칠 더 머물러야 했다. 내가 며칠 먼저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나에게, 신던 신발을 버리고 갈 거냐고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신어서 버려야 마땅한 신발이었다. 아주 어려웠던 때 사 신은 신발이라 버리기 뭐했지만 버리겠다고 했다.
뭐든 다 끌어안고 살지 말고 조금씩 버리고 살라는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서였겠다. 아마도.
가방을 싸면서 낡은 신발을 휴지통에 버리려 하는데 당신이 말했다.

"거기 한쪽에 두고 가. 그냥 내가 바라보게......"

어쩌면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말이 생각나는 걸까.
그 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걸까.
단지 우리가 며칠 머물던 호텔의 건너편 쪽에 앉아 있을 뿐인데.

-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

Comments

Popular posts from this blog

20여 년만에 캐논 IXY 55 (익서스 50) 꺼내들고..

음알못의 오늘의 선곡

2026년 추석 열차표 예매 분투기

Earthseed에 대해 희망을 가질수록 커지는 파멸에의 확신 –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

점점 배가 나와서.. 만 보 걷기를 재개하기로..